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찰 복강안 (문단 편집) == 기타 == 건륭제 통치 기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그 유명한 [[니오후루 허션]]도 복강안과는 겨룰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푸차 가문과 니오후루 가문의 차이도 있고, 군부의 거물인 복강안과 함부로 다투기 힘든 것도 있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내정을 맡던 화신과 외정을 맡던 복강안이 마주칠 일도 적었다. 건륭제 재위 내내 신하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오죽하면 [[건륭제]]가 부항의 부인과 간통하여 나은 사생아 아니냐는 야사도 있다. 부항의 다른 아들들도 황실과 거듭 혼사를 치렀는데[* 첫째는 강희제의 손자인 애신각라 영존의 사위가 되었고, 둘째형 복령안은 건륭제의 사위였다.] 정작 이 집안에서 건륭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복강안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은 복강안이 사생아라 공주들과는 배다른 남매가 되기 때문에 결혼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야사이긴 하나 남아있는 초상화에서 알 수 있는 외모 역시 비슷하다면 비슷한 점이 많이 보이는 등[* 부항 초상화의 인상은 [[https://en.wikipedia.org/wiki/Fuheng#/media/File:Qing_General_Fu_Heng.jpg|#]] 마음씨 넉넉해 보이는 아저씨같은데, 복강안 초상화의 인상은 [[https://en.wikipedia.org/wiki/Fuk%27anggan#/media/File:Fuk'anggan.jpg|#]] 건륭제가 젊었을 때의 모습과 비슷하게 오만함과 교활함이 배어 나온다.] 야사치고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꾸준히 회자되는 떡밥이라 각종 매체에서는 이 사생아설이 빈번하게 묘사되곤 한다. 부항이 젊을 때엔 사천, 섬서, 감숙 등 최전선에 자주 나가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건륭제가 북경에서 술김에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노년기에는 여러 황자들보다 복강안을 더 신임하는 부황의 모습에 황자들이 시기하는 묘사도 나온다. 외정에서는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취했는데, 양광 총독으로 있을 때부터 외국 상인에 대해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영국이 청나라에 통상개방을 요구하기 위해 보낸 조지 매카트니 사절단이 왔을 때는 사신들에게 황제를 알현할 때 삼궤구고두례를 올리라고 했다. 매카트니는 이게 한이 되었든지 영국으로 돌아간 이후 회고록에서 복강안에 대해 악평을 하고 그의 군대가 서양에서는 이미 도태된 [[조총]](화승총)을 쓰는 것을 비웃었다. 당시 영국은 좀 더 개조된 [[머스킷]] 소총을 쓰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치를 좋아하고, 돈을 물쓰듯 썼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긴 [[가경제]]도 복강안의 사치를 매우 비판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